생활/문화

현실보다 더 소름 돋는 연극 ‘시련’, 연기파 총출동

연극 ‘시련’이 6년 만에 다시 무대 위로 돌아왔다. 이번 무대는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펼쳐지며, 엄기준, 김수로, 박은석, 류인아 등 연기력으로 정평 난 배우들이 총출동했다. 연극은 무대의 형식부터 내용까지 관객을 완전히 몰입하게 만든다. 하얗게 칠해진 사방 막힌 벽 속, 배우들은 숨가쁘게 대사를 쏟아내고 관객은 점차 그 혼란 속에 휘말려 든다. 이러한 연출은 극 중 주요 소재인 마녀재판의 광기와 긴장감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시련’은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가 1953년 발표한 대표작이다. 1692년 실제 미국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에서 발생한 마녀재판 사건을 바탕으로 하며, 당시 미국 사회를 휩쓴 매카시즘 광풍을 비판하기 위해 창작됐다. 밀러는 극을 통해 개인이 집단의 이익과 정치적 도구로 희생되는 과정을 그리고, 진실과 정의, 양심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되묻는다.

 

작품의 배경은 마을 소녀들이 숲속에서 벌인 일종의 장난에서 시작된다. 이 장난은 곧 마을 전체를 흔드는 마녀재판으로 확산된다. 소녀들은 갑작스레 마녀를 색출하는 신의 도구가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공포와 의심 속에 서로를 고발한다. 이 와중에 평판 좋은 농부 존 프락터는 소녀들의 주장이 허위임을 알아차리지만,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마녀로 몰리며 그 역시 재판에 끌려들게 된다. 존은 결국 자신의 양심과 타협하지 못한 채 진실을 외치며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연극의 미장센은 극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강화한다. 흰색 벽으로 둘러싸인 무대는 배우들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마을 공동체가 가진 폐쇄성과 이중성을 드러낸다. 조명과 음향은 공포영화를 연상시키듯 긴장을 고조시키며, 특히 눈동자를 뒤집은 소녀들이 몸을 비트는 장면에서는 공포와 불쾌감이 관객의 몸을 타고 흐른다. 전체 러닝타임 180분 동안 긴장과 몰입은 한 순간도 끊기지 않는다.

 

 

 

‘시련’은 총 23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대형 연극이다. 이들이 각기 다른 인물로 무대에 등장하면서 세일럼 마을 특유의 광기 어린 분위기가 탄탄하게 구성된다. 출연진은 연극, 드라마, 영화 등 다방면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인물들이다. 존 프락터 역에는 엄기준과 강필석이 번갈아 무대에 오른다. 두 배우는 각자의 방식으로 존의 고뇌와 분노, 양심을 그려내며 무대에 깊이를 더한다.

 

사무엘 패리스 목사 역은 박은석이 맡았다. 그는 권위주의적이고 탐욕스러운 인물로서 마을 혼란을 더욱 부추긴다. 반면, 진실을 좇으려는 목사 존 헤일은 박정복이 연기하며 인물 간의 윤리적 갈등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마녀재판을 주도하며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댄포스 판사는 남명렬이, 거짓 증언과 감정의 폭발로 재판을 조작하는 애비게일 윌리엄스 역은 류인아가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존 프락터의 아내이자 희생자의 상징인 엘리자베스는 여승희가, 애비게일의 조작극에 휘말리게 되는 하녀 메어리 워렌은 진지희가 연기한다. 다양한 인물이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각자의 신념과 욕망, 공포가 교차하며 이야기는 숨 돌릴 틈 없이 진행된다.

 

이번 공연의 연출은 연극계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신유청이 맡았다. 그는 ‘우리는 모두 세일럼 마을에 살고 있다’는 구절을 중심으로, 현대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집단 광기와 가짜 뉴스, 마녀사냥을 되짚는다. 그는 관객에게 “진실을 말하고 죽을 것인가, 거짓을 말하고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여전히 유효하며, 관객의 마음 깊숙한 곳을 찌른다.

 

공연은 오는 4월 27일까지 계속된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무대 위에서는 인간의 본성과 사회 시스템, 정의와 거짓, 신념과 타협의 문제가 격렬하게 충돌한다. ‘시련’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이 순간에도 되새겨야 할 거대한 질문을 품은 연극으로, 관객에게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